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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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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1467년 조선 세조 때 원각사 건립과 함께 세워진 석탑으로,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3층 기단과 10층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높이는 12m이다. 원래 고려 시대 흥복사 터에 건립되었으나, 연산군 때 원각사가 폐쇄된 후 탑만 남았고, 임진왜란 때 상단부가 훼손되었다. 1897년 탑골공원이 조성되었으며, 1947년 상부 3층이 복원되었고, 2000년에는 표면 보호를 위해 유리 케이스가 설치되었다. 이 탑은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모델로 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2010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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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원각사지 십층석탑
명칭원각사지 십층석탑 (圓覺寺址 十層石塔)
영문 명칭Ten-story Stone Pagoda at Wongaksa Temple Site, Seoul
위치
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99 탑골 공원
상세 정보
종류석탑
시대조선 시대
지정 번호국보 제2호
지정 일자1962년 12월 20일
소유국유

2. 역사

1467년(세조 13년)에 건립된 것이 탑 상부의 명문에서 확인된다.[1] 높이는 12m이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3층의 기단과 10층의 탑신을 가지며, 탑신에는 인물, 초화, 용, 사자 등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1590년대 임진왜란 때 탑의 상단부가 무너졌으나, 1947년 미국 공병대에 의해 복원되었다.[1] 2000년에는 표면 손상이 심해져 유리 케이스를 설치했다.

19세기 말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이 탑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지만, 작은 집의 뜰에 가려져 접근하기 어려웠다. 1897년 고종의 재정 고문이었던 아일랜드인 존 맥레비 브라운은 국왕의 허가를 받아 이 지역을 서울 최초의 공원으로 만들고 탑골공원이라 불렀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도 같은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탑골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탑은 보호 유리 케이스 안에 있다.

이 탑은 미술사학자들에게 한국 최고의 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1] 1962년 12월 12일에 대한민국 국보 제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고적도보』 13권에 실린 사진. 1947년 상부 3층이 복원되기 전의 모습이다.

2. 1. 건립 배경

조선 세조 11년(1465)에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가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었으나,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내면서 없어지게 되었다.[1]

고려 시대 이래 흥복사라는 고찰이 이 부근에 있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았으나, 이후 불교 억압 정책으로 쇠퇴했다. 세조1464년 자신이 저지른 살생을 뉘우치기 위해 흥복사를 원각사로 개칭하여 확장하고, 많은 당우와 문, 대장경전,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십층석탑을 건립했다.

그러나 1504년, 불교 배척에 열심이었던 연산군은 원각사를 폐지하고, 다음 해에는 절 건물에 음악을 관할하는 장악원을 이전시키고, 기생을 두어 왕의 향락의 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후, 조정 신하와 유생들의 반대로 불교 사찰 재건 기회는 좌절되었다.

2. 2. 원각사 창건과 십층석탑 건립

조선 세조 11년(1465)에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가 세워졌다. 원각사는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었으나,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집으로 만들면서 승려들이 쫓겨나고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1]

원각사 창건을 기념하는 탑과 기념비만이 살아남았다. 19세기 말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아름다운 탑에 감탄했지만, 작은 집 뜰에 가려져 접근하기 어려웠다. 1897년 고종의 아일랜드 재정 고문인 존 맥레비 브라운은 왕의 허가를 받아 이 지역을 서울 최초의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곳을 탑골공원이라 불렀고, 1919년 3·1 운동 당시에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이 탑은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아름답게 보인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1467년(세조 13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1]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 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임진왜란 동안 탑의 상단부가 무너져 탑 아래에 놓여 있다가 1947년 미국 공병대에 의해 복원되었다. 표면 손상이 심해져 2000년에는 유리 케이스를 설치했다.

이 부근에는 예전에 고려 시대 이래의 고찰이었던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았으나, 후에 불교 억압 정책으로 쇠퇴했다. 세조1464년 자신이 저지른 살생을 뉘우치기 위해 흥복사를 원각사로 개칭하여 확장하고, 많은 당우와 문, 대장경전, 그리고 현재도 남아있는 십층석탑을 건립했다.

그러나 1504년 불교 배척에 열심이었던 연산군은 원각사를 폐지하고, 다음 해에는 절 건물에 음악을 관할하는 장악원을 이전시키고, 기생을 두어 왕의 향락의 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후 불교 사찰 재건의 기회는 조정 신하와 유생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중종 시대인 1514년경에는 아직 건물의 대부분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나, 1519년에는 대부분이 사라지고, 십층석탑만 남았다.

2. 3. 연산군 대의 수난과 폐사

연산군은 숭유억불정책을 펼치며 1504년에 원각사를 폐지하고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쫓았다.[1] 이후 원각사는 절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은 원각사를 관청으로 사용하였다.[1]

중종 시대인 1514년경에는 아직 건물의 대부분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나, 1519년에는 대부분이 사라지고 십층석탑만 남게 되었다.

2. 4. 폐사 이후

연산군은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 사찰로 보호되어 오던 원각사를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집으로 만들고 승려들을 내보내 절을 폐사시켰다.[1] 중종 때에는 관청으로 사용되었다. 원각사 창건을 기념하는 탑과 기념비만이 살아남았고, 사찰 터는 나중에 가옥으로 사용되었다.

1590년대 임진왜란 동안 탑의 상단부가 무너졌는데, 1947년 미국 공병대에 의해 복원되었다.

19세기 말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아름다운 탑에 감탄했지만, 작은 집의 뜰에 가려져 거의 접근할 수 없었다. 1897년 고종의 아일랜드 재정 고문인 존 맥레비 브라운은 국왕의 허가를 받아 그 지역을 서울 최초의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곳을 탑골공원이라 불렀고, 1919년 3·1 운동 당시에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오늘날 이 공원은 탑골공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탑은 보호 유리 케이스 안에 서 있다.

2. 5. 근현대

1947년 미국 공병대에 의해 탑의 상단부가 복원되었다.[1] 1897년 고종의 아일랜드 재정 고문인 존 맥레비 브라운은 국왕의 허가를 받아 이 지역을 서울 최초의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곳을 탑골공원이라 불렀고, 1919년 3·1 운동 당시에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오늘날 이 공원은 탑골공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탑은 보호 유리 케이스 안에 서 있다. 19세기 말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아름다운 탑에 감탄했지만, 작은 집의 뜰에 가려져 접근하기 어려웠다.

이 탑은 미술사학자들에게 한국 최고의 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 1962년 12월 12일에 대한민국 국보 제2호로 지정되었다. 상부 3층은 무너져 오랫동안 내려져 있었으나, 1947년에 원형대로 복구되었다. 표면 손상이 심해져 2000년에는 유리 케이스를 설치했다.

3. 구조

조선 세조 11년(1465)에 원각사가 세워졌고, 1467년에 탑이 건립되었다.[1] 이 탑은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다.

3. 1. 재료 및 형태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원각사에 세워진 이 탑은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일하게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높이는 약 12m이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아름답다. 한국 석탑의 일반적인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 구조 등이 고려 시대의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매우 비슷하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용, 사자, 연꽃무늬 등 여러 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각 층에는 용, 사자, 연꽃, 불사조, 부처, 보살, 사천왕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이 탑은 돌로 만들어졌지만, 나무로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조각되었다. 탑은 나무 탑의 디자인을 모방한 첨차, 기둥, 곡선 지붕 모양을 가지고 있다.[1]

3. 2. 세부 조각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용, 사자, 연꽃무늬 등 여러 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1] 각 층에는 용, 사자, 연꽃, 불사조, 부처, 보살, 사천왕 등이 조각되어 있다.

3. 3. 경천사지 십층석탑과의 비교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고려 시대의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 구조 등이 매우 비슷하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일반적인 한국 석탑의 재료인 화강암이 아닌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이하다.[1]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1348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 경천사에 건립되었으나, 1907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18년 한국으로 반환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명칭 변경

2010년 12월 27일 문화재청은 '원각사지십층석탑'이라는 이전 명칭을 행정 구역 명칭 표기 및 한글 맞춤법(띄어쓰기)을 적용하여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으로 변경하였다.[2]

참조

[1] 간행물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7-14
[2] 뉴스 문화재청고시 제2010-133호,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석조) 지정명칭 변경 http://gwanbo.mois.g[...] 대한민국 관보 201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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